풍수지리에 대하여 알고싶으신가요?
주시는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원장님,안녕하십니까? 저는 풍수지리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입니다. 이번에 영릉에 대하여 report 를 제출하여야 하기 때문에 다른 풍수 site 에 질문을 하였으나 답변이 시원치 않고 어떤곳에서는 답변 조차 없습니다. 원장님에 관하여는 그 명성을 잘알고 있고, 질의 응답을 꼼꼼히 보고 있습니다. 12일 까지 제출하혀야 하는데 너무 시간이 촉박해요. 죄송하지만 답사하신 내용이나 유래에 대하여 꼭~꼭 부탁드려요. 우리 학생들중 원장님의 site 를 보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해박하시고 논리적이고 성실하신 답변내용에 우리과 학생한테 인기 최고예요. 우리 학교나 다른 강의에서 듣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죄송하지만 영릉에 관하여 좋으신 말씀 부탁드려요. 안녕히 계십시요.
===== 이윤성님이 작성하신 내용 ===== 원장님,안녕하십니까? 저는 풍수지리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입니다. 이번에 영릉에 대하여 report 를 제출하여야 하기 때문에 다른 풍수 site 에 질문을 하였으나 답변이 시원치 않고 어떤곳에서는 답변 조차 없습니다. 원장님에 관하여는 그 명성을 잘알고 있고, 질의 응답을 꼼꼼히 보고 있습니다. 12일 까지 제출하혀야 하는데 너무 시간이 촉박해요. 죄송하지만 답사하신 내용이나 유래에 대하여 꼭~꼭 부탁드려요. 우리 학생들중 원장님의 site 를 보는 친구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해박하시고 논리적이고 성실하신 답변내용에 우리과 학생한테 인기 최고예요. 우리 학교나 다른 강의에서 듣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죄송하지만 영릉에 관하여 좋으신 말씀 부탁드려요. 안녕히 계십시요. RE:귀하께서 report 제출 때문이라 하니 상당히 많은 분량의 자료가 필요할것으로 생각되나, 본인이 기술한것외에 부족한 부분은 본 연구원을 찾아주시면 상세히 설명하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세종의 능은 서초구 내곡동의 헌릉(아버지인 태종이 모셔진 현 국정원 자리)옆에 자리 잡았으나 문종 재위 2 년(문둥병으로 승하),단종 재위3년(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의 청령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세조 13년 재위(등창으로 승하하였다고 하나 실은 문둥병으로 승하),예종 1년 2개월만에 승하,네명의 왕이 19년 재위라는 짧은 기간 왕위를 유지하였다는것은 참으로 불행한 역사가 아닐수 없습니다. 이에 총명한 예종은 신숙주,한명회,홍윤성,서거정,노사신등과 숙의하여 이장할 당시 평안도 관찰사인 광주 이씨의 후손인 이극배를 설득하여 조상인 이계전과 이인손(영의정을 지냄)의 묘를 이전케 하고, 지금의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 83-1 로 이장을 하게 됩니다.(지석의 내용은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아버지이신 태종곁에 묻히고자 했었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당시 유명한 지관(50 여명)들이 자리 잡았다는 능을 이장하러 파묘하여 보니, 수렴과 빙렴이 들어 시신은 물론 삼베 하나 썩지 않은 참혹한 모습이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이것이 풍수지리학에서의 동기감응의 무서운 사료(史料)로 전하여 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영릉(英陵)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으로 子坐午向(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북성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암봉황포란형의 대명당으로 좌청룡과 우백호가 절묘하게 교쇄되어 있는 회룔고조형이고,득수,파구가 절묘하게 이루어져 광릉과 더불어 조선의 역사를 연장케한 대명당터로 간주합니다.특히 영릉 앞의 음양이론에 근거한 연못의 의미를 모른체 후세들이 쌓은 석축은 옥에 티라고 할수가 있습니다. 바로 옆의 영릉(寧陵)에 모셔진 효종과 그이 비이신 인선왕후의 왕릉도 잊지말아야야할 중요한 문화유적지 인것입니다.이장후 태평성대를 이룬 성종대왕의 25년 재위를 우연이라고 간주하기에는 네분의 왕의 말로는 너무도 비참하였기에 세종대왕릉의 이장은 풍수학도는 물론 문외한에 조차에도 시사하는바가 매우 크다고 할수가 있습니다.(외국에는 영릉에 관한 자료가 상당히 많습니다) 이런한 역사적 사실이야말로 음택에 드는 병렴이 후손에게 무섭게 감응되어져 나타나는 엄연한 역사적인 진실의 한 단면에 불과한것임을 망각해서는 안될것입니다. 思辯的 사고로 일관하고, 전승(traditional)을 무시하여 우리 민족의 한계성과 민족문화의 전통을 말살하고,우리의 문화 유적지를 찾는것을 불경스러운것으로 간주케하고,같은 神 을 믿는 신자에게 타 교회를 비방하고,이단시하게하는 오늘날의 성직자들은 분명코 회개의 주체임을 망각해서는 아니될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사랑하는것은 미신이고 서양에서 들어오는것은 무조건 그리스도적이라는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며 독선과 아집인것입니다.우리의 전통을 연구하여 버릴것은 버리고 취할것은 취하는 개방된 사고야 말로 영릉의 또 다른 의미를 생각케할수 있는 귀한 선례가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흉지라고 밝혀진 곳에 하필이면 국정원을 자리잡게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감사 합니다.